후에 카이딘 황제릉
후에, 카이딘황제릉(啓定帝陵) Lăng Khải Định 응릉
베트남 '후에'는 '응우예 왕조'의 수도가 있었던 '고도(古都)' 우리나라 경주와 비슷하게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Khải Định, Thủy Bằng, Tp. Huế, Thừa Thiên Huế
카이딘 황제릉(启定陵), 응릉(應陵)은 후에 시내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차우구 언덕에 있다.
베트남의 건축양식과 유럽(프랑스)의 고딕양식이 결합된 유일한 왕릉이다.
능역의 규모는 117m×48.5m로 선대 황제들의 능역에 비해 작은 편이다.
선대 황제들의 능은 산과 호수를 능원으로 거느리고 있어 독립된 대공원이 모습을 띠지만, 카이딘 황제의 능역은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건축물로만 채워지면서 규모는 작아졌다.
응우옌 왕조 12대 황제, 본명은 응우옌푹투안(阮福昶 Nguyễn Phúc Tuấn)이다. 재위 기간은 1916년 ~ 1925년까지 9년이다.
첫번째 부인(호앙티꾹)과 두 번째 부인 모두에게서 자식이 없었고, 나중에 뜨꿍이라는 후궁에게서 아들을 얻는데, 이 아들이 카이딘의 뒤를 이어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가 된다.
4명의 비빈과 10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잠자리에 관심이 없고 게이라는 소문도 있다. 아버지 동카인 황제처럼 병약했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 동카인 황제가 죽었을 때 네 살인 카이딘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될 수 없었고, 죽득 황제의 열 살짜리 아들인 타인타이(Thanh Thai) 황제와 그 아들 주이떤(Duy Tan)이 차례로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부자 황제가 식민 통치에 저항하자 추방하고, 1916년 프랑스는 식민 통치에 협조적이었던 동카인의 아들 카이딘을 즉위시킨다.
아버지 동카인처럼 카이딘은 프랑스 통치자들의 인형 노릇을 하며 베트남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판쩌우찐(潘周楨 1871~1926)은 1922년 '칠점표(七點表)'라는 공개 서한을 통해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프랑스에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카이딘 황제를 맹렿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황제의 잘못으로 인한 귀족들의 권한 남용, 형벌의 불공평, 부도덕한 정도의 사치 등을 지적하고 황제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카이딘은 1923년 자신의 능을 짓기 위해 베트남 농부에 대한 세금을 올리며 베트남을 경제적 곤궁에 빠뜨렸다. 그리고 판보이쩌우(潘佩珠) 같은 민족주의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자국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한 마디로 카이딘은 베트남인들에게 자신의 안일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더러운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오죽하면 "카이딘의 유일한 업적은 스스로 만든 자신의 무덤"이라고 비아냥 댈 정도로..
산기슭에 만들어져서 127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앞줄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한 쌍씩, 뒷줄에는 6기의 호위무사상과 말과 코끼리가 배치돼 있다.
기둥에는 용을, 지붕 난간은 귀면상을 중심에 두고 용을 새겨 놓았다. 왕실의 위엄과 벽사의 의미가 표현되었다.
대칭 구조를 가진 건물, 동서 외벽엔 11자로 맞춘 한문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에 새겨진 문장은 모두 11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仁)을 이루는 것이고 하루라도 극기복례하면 세상이 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인을 이루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겠는가?
그 아래에 적힌 문장
四面獻奇觀風景別開宇宙(사면헌기관풍경병개우주) 사방으로 주는 빼어난 풍경은 별천지를 열고
億年鍾旺氣江山長護儲胥(억년종왕기강산장호저서) 억년 세월 좋은 기운 받은 강산은 군영(軍營)을 길이 감싸네.
王懋昭大德 建中于民. 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왕께서는 힘써 큰 덕을 밝히셔 백성들에게 중심을 세워 주십시오. 의로써 일을 다스리시고, 예로써 마음을 다스려 후세에 너그러움을 남겨 주십시오.
그 아래에 적힌 문장
風景無邊萬狀神氣天作合(풍경무변만상신기천작합) 풍경은 끝이 없고 만상의 신령스러운 기운은 절로 생기는데
江山有主千秋福蔭地留餘(강산유주천추복음지유여) 강산은 주인이 있어 천년 복내림으로 땅은 넉넉함으로 머무는구나
의자에 앉은 등신상(等身像)은 카이딘[Khai Dinh/啓定] 황제의 생전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한 뒤 금박을 입힌 것이라고 한다.
황제의 유해는 위 동상아래 지하 18m에 위치하고 있다.
집무를 보는 황제의 모습
카이딘 황제가 착용했다는 버클. 항상 병약했던 그는 허리가 22인치였다한다.
왠만한 여자관광객들은 못찬다;;
베트남 '후에'는 '응우예 왕조'의 수도가 있었던 '고도(古都)' 우리나라 경주와 비슷하게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Khải Định, Thủy Bằng, Tp. Huế, Thừa Thiên Huế
카이딘 황제릉(启定陵), 응릉(應陵)은 후에 시내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차우구 언덕에 있다.
베트남의 건축양식과 유럽(프랑스)의 고딕양식이 결합된 유일한 왕릉이다.
능역의 규모는 117m×48.5m로 선대 황제들의 능역에 비해 작은 편이다.
선대 황제들의 능은 산과 호수를 능원으로 거느리고 있어 독립된 대공원이 모습을 띠지만, 카이딘 황제의 능역은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건축물로만 채워지면서 규모는 작아졌다.
카이딘 황제 (啓定帝 1885-1925)
응우옌 왕조 12대 황제, 본명은 응우옌푹투안(阮福昶 Nguyễn Phúc Tuấn)이다. 재위 기간은 1916년 ~ 1925년까지 9년이다.
첫번째 부인(호앙티꾹)과 두 번째 부인 모두에게서 자식이 없었고, 나중에 뜨꿍이라는 후궁에게서 아들을 얻는데, 이 아들이 카이딘의 뒤를 이어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가 된다.
4명의 비빈과 10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잠자리에 관심이 없고 게이라는 소문도 있다. 아버지 동카인 황제처럼 병약했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 동카인 황제가 죽었을 때 네 살인 카이딘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될 수 없었고, 죽득 황제의 열 살짜리 아들인 타인타이(Thanh Thai) 황제와 그 아들 주이떤(Duy Tan)이 차례로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부자 황제가 식민 통치에 저항하자 추방하고, 1916년 프랑스는 식민 통치에 협조적이었던 동카인의 아들 카이딘을 즉위시킨다.
아버지 동카인처럼 카이딘은 프랑스 통치자들의 인형 노릇을 하며 베트남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판쩌우찐(潘周楨 1871~1926)은 1922년 '칠점표(七點表)'라는 공개 서한을 통해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프랑스에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카이딘 황제를 맹렿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황제의 잘못으로 인한 귀족들의 권한 남용, 형벌의 불공평, 부도덕한 정도의 사치 등을 지적하고 황제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카이딘은 1923년 자신의 능을 짓기 위해 베트남 농부에 대한 세금을 올리며 베트남을 경제적 곤궁에 빠뜨렸다. 그리고 판보이쩌우(潘佩珠) 같은 민족주의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자국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한 마디로 카이딘은 베트남인들에게 자신의 안일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더러운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오죽하면 "카이딘의 유일한 업적은 스스로 만든 자신의 무덤"이라고 비아냥 댈 정도로..
산기슭에 만들어져서 127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난간을 용으로 새긴 웅장한 계단과 고딕식 첨탑처럼 솟아 있는 정문
삼관문 三關門 ( Cổng Tam quan )
36개의 계단위에 패방 형식의 문과 그 안쪽과 양쪽으로 오벨리스크(Trụ Biểu)를 거느린 비정(碑亭)카이딘 황제의 공덕비(功德碑)가 있는 비각(碑閣)
앞줄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한 쌍씩, 뒷줄에는 6기의 호위무사상과 말과 코끼리가 배치돼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황제의 유해가 묻혀 있는 능묘가 있는 천정궁(天定宮 Cung Thiên Định)정중앙 위쪽에 새겨넣은 글자 '天定宮'(천정궁)
기둥에는 용을, 지붕 난간은 귀면상을 중심에 두고 용을 새겨 놓았다. 왕실의 위엄과 벽사의 의미가 표현되었다.
대칭 구조를 가진 건물, 동서 외벽엔 11자로 맞춘 한문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에 새겨진 문장은 모두 11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쪽 현관 외벽에 새겨진 '爲仁由己'(위인유기)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仁)을 이루는 것이고 하루라도 극기복례하면 세상이 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인을 이루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겠는가?
그 아래에 적힌 문장
四面獻奇觀風景別開宇宙(사면헌기관풍경병개우주) 사방으로 주는 빼어난 풍경은 별천지를 열고
億年鍾旺氣江山長護儲胥(억년종왕기강산장호저서) 억년 세월 좋은 기운 받은 강산은 군영(軍營)을 길이 감싸네.
서쪽 현관 외벽에는 '以禮制心'(이례제심) '예로써 마음을 다스리라!"
서경에서 재상 중훼(仲虺)가 탕왕에게 군주의 도를 이른 말을 인용한 것이다.
王懋昭大德 建中于民. 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왕께서는 힘써 큰 덕을 밝히셔 백성들에게 중심을 세워 주십시오. 의로써 일을 다스리시고, 예로써 마음을 다스려 후세에 너그러움을 남겨 주십시오.
그 아래에 적힌 문장
風景無邊萬狀神氣天作合(풍경무변만상신기천작합) 풍경은 끝이 없고 만상의 신령스러운 기운은 절로 생기는데
江山有主千秋福蔭地留餘(강산유주천추복음지유여) 강산은 주인이 있어 천년 복내림으로 땅은 넉넉함으로 머무는구나
천정궁(天定宮 Cung Thiên Định) 내부
계성전[啓成殿, Cung Thien Dinh]카이딘[Khai Dinh/啓定] 황제의 유해가 있는 곳으로 화려한 금박 장식과 도자기 파편을 이용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다.
의자에 앉은 등신상(等身像)은 카이딘[Khai Dinh/啓定] 황제의 생전 모습을 청동으로 조각한 뒤 금박을 입힌 것이라고 한다.
황제의 유해는 위 동상아래 지하 18m에 위치하고 있다.
집무를 보는 황제의 모습
카이딘 황제가 착용했다는 버클. 항상 병약했던 그는 허리가 22인치였다한다.
왠만한 여자관광객들은 못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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